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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팩트 파인딩/ 現代史 왜곡의 원점- 교과서에 실린 ‘치스차코프 포고문’ 의 진실 검증!
‘포고문’이 아닌 선동적 ‘호소문’… ‘해방자’로 미화되는 치스차코프 사령관,“(조선인이 저항하면) 조선인 절반을 교수형에 처할 것”. 당시 소련군 보고서의 적나라한 自家 비판을 공개한다.
趙成豪(조갑제닷컴)    201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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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교육’과 ‘동아출판사’ 刊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소위 ‘치스차코프(1945년 당시  소련 극동군 25군 사령관) 포고문’에 대해 검증해보았다.


8種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중 이들 두 출판사의 교과서는,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을 ‘맥아더 포고령’과 나란히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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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출판사-26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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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교육-346페이지>

 

1. 문제 제기

언뜻 보면, 맥아더 포고령은 ‘적극 협조’, ‘권한’ 등의 용어를 사용해 딱딱하고 다소 고압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치스차코프 포고문에는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注: 조선인)들에게 달렸다’,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켜라’라는 등의 선동적인 문구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치스차코프 포고문은 一見(일견), 日帝로부터 해방된 주민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주는 듯하다.

이들 교과서는 두 개의 포고문을 同格(동격)으로 배치, 설명을 달아놓았다. 소련군은 간접통치를 했고, 美軍은 직접통치를 했다고 설명, 소련군을 추켜세우고, 美軍을 깎아내리는 듯하다.

소련군은, 치스차코프 포고문에 의하여 ‘한반도의 해방자’로 온 것처럼 포장되었다. 이는 소련 괴뢰정권의 首傀(수괴)로 등장한 김일성과 북한 공산주의를 정당화 시켰고, 지난 70여 년간 북한정권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왜곡되는 시발점 역할도 했다. 즉, 한국 현대사 왜곡의 原點(원점)이 바로 이 치스차코프 포고문이라 불리는 자료인 셈이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한반도 以南(이남)과 以北(이북)은 美군정과 소련군정에 의해 분할통치가 이뤄졌다. 이때 각 軍政(군정)을 대표하는 맥아더와 치스차코프가 통치 지역에 포고령을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맥아더 포고령’은 그 배경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만,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은 그 성격과 발표 시기를 둘러싸고 학계에 여러 異見(이견)이 있다.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의 실체와 의미, 그리고 ‘해방자’로 왔다던 소련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았다.


2. ‘포고문’인가 ‘선전·선동 문건’인가?

대한민국 건국사와 해방 전후의 역사를 사실에 입각해 연구해온 孫世一(손세일·前 국회의원) 씨는, 자신의 저서 《李承晩과 金九》에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주한 직후인 1945년 8월28~29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제25군 군사회의 위원 레베데프 소장은 8월28일 저녁에 28명의 소련계 한인들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다.…(中略)… 평안남도 도청 청사는 소련군사령부가 사용하게 되었다.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유명한 포고문이 북한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원래 이 포고문은 제25군 사령부가 연길에 있던 8월15일자로 작성된 것이었으나, 언제 어느 지역에 뿌려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뒤에 각종 문헌에 수록된 포고문에는 날짜가 들어있지 않다.
“조선인민들에게!… "(下略·앞서 게재된 ‘치스차코프 포고문’ 全文과 중복)
포고문은 한국인들의 해방의 기쁨을 한껏 고무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한국에 대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표명한 것은 없었다. 구체적인 것은 기업가에게 재산보호와 기업소의 정상조업을 보장하고 노동자에게 노동을 계속할 것을 촉구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치스차코프의 이 포고문은 38도선 이남지역에 美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을 선포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위압적인 「태평양 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제1호)와 대비되면서 좌익들의 선전자료로 이용되었다.>


주목할 것은 孫 씨의 지적대로 ‘좌익들의 선전자료로 이용되었다’는 부분이다. 2005년 7월27일, 姜禎九(강정구) 당시 동국대 교수는, <데일리 서프라이즈>라는 인터넷 매체에 맥아더를 비난하는 칼럼을 기고했다. 姜 씨는, “맥아더와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는 하늘과 땅 차이”라며 “소련은 자기들이 직접 통치행위를 책임지는 군사정부가 아니라 조선인 자치정부 성격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인 점령정책을 펴나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치스차코프 포고문을 근거로 美군정은 ‘직접통치’를 한 반면, 소련 군정은 ‘간접통치’를 했다고 주장, 맥아더를 ‘민족 분단의 장본인’格으로 매도했다.

1980년대 左傾(좌경) 학생 운동권 내에서도 이런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다. 일례로 1987년 9월4일,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는 자신들이 발행하는 <민주광장> 제8호에 이 두 개의 포고문을 나란히 게재,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란 기사를 실었다. 그 당시 학생 운동권은 의식화 학습자료로 치스차코프 포고문을 惡用, 소련軍은 ‘해방군’으로, 美軍은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왔다고 강변하며 학생들에게 反美의식을 주입시켰다.


3. 전문가들의 입장

‘치스차코프 포고문’과 관련해 전문가들의 입장을 들어보았다. 金光東(김광동) 박사(나라정책연구원장)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글의 정확한 原자료는 현재까지 알려진 게 없다. 현재까지 가장 많이 피인용 된 게 1958년 북한이 발간한 《조선통사》이다. 이 책 下권 288~289페이지에 치스차코프 포고문이 실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도 정확한 날짜는 나와 있지 않다.>

金 박사는 “좌익은 선전·선동의 鬼才(귀재)이다. 당시 소련군은 북한 지역 주민들에게 아부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처럼 달콤한 포고문을 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20년 뒤인 1978년 북한이 발간한 《현대조선역사》에는 치스차코프 포고문이 빠졌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소련의 역사를 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金 박사는 “대한민국 교과서가 북한 문헌에 나온, 그것도 실체가 불분명한 자료를 수록한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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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사>에 실린 이른바 '치스차코프 포고문' / 자료 제공: 金光東 박사


 
權熙英(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權 교수는 “소련군이 북한 지역을 점령한 뒤 뿌려진 일종의 ‘삐라’로 볼 수 있을뿐, 정식 포고문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들 모두, ‘치스차코프 포고문’이 교과서에 실린 점을 비판했다.

丁慶姬(정경희) 영산대 교수는 <조선PUB>(2014년 1월)와 한 인터뷰에서, ‘맥아더 포고령’과 ‘치스차코프 포고문’을 나란히 게재한 교과서들이 학생들에게 소련(러시아)에 우호적이고, 미국에 비판적인 시각을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丁 교수는 “美軍의 포고령은 구체적인 방침이 담긴 딱딱한 法令(법령)이고, 소련군의 포고문은 추상적인 원칙을 나열하고 있는 문건인데, 그걸 나란히 실어놓고 비교하라는 과제를 내주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저는 이 서술을 보면서 ‘필자들이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인식을 학생들한테 전달하기 위해서 참 연구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북한의 역사서 《조선통사》 下권을 보니까 치스차코프의 포고문과 맥아더의 포고령이 순서만 바뀌었을 뿐 나란히 실려 있더군요. 그리고 이 두 문건을 근거로 소련군은 ‘해방군’이고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강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의 현실입니다. 역사용어나 해석뿐 아니라 서술방식까지도 북한 역사책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4. 美蘇 각 포고문의 진실

‘맥아더 포고령’과 소위 ‘치스차코프 포고문’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면, 後者(후자)가 더 한반도 주민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우선 포고문 발표 시점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발표 시점은 한동안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 全文을 게재한 <해방일보>(1945년 10월31일字)와 《북조선연감》 등이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인용한 자료에 의하면,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동양학연구소가 소련의 공식문서를 편집해 1981년 출간한 자료집 《소련-북한의 관계, 1945~1980》에 치스차코프 포고문 발표 날짜를 ‘1945년 8월15일’이라고 明記(명기)했다고 한다.

1945년 8월15일에 발표(혹은 배포)된 게 맞다면, 그로부터 25일 뒤에 1945년 9월9일에 ‘맥아더 포고령’이 발표되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치스차코프가 포고문을 발표했을 당시에는 한반도로 들어온 소련군이,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점만 알았을 뿐,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될지에 대해선 미처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소련군 상황을 보면 이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소련군은 함경북도의 몇몇 항구만을 점령하고 있었을 뿐, 38도선까지 南下(남하)하는 계획은 세워두고 있지 않았다. 소련 정부가 동의하고, 미국으로부터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 한다’는 통보를 받은 날짜는 ‘1945년 8월16일’이었다(美 국방부가 한반도 분할통치를 위해 작성한 ’일반명령 1호’가 발효된 시점).

소련군 수뇌부는 그해 8월24일이 되어서야 치스차코프에게 함흥이나 평양에 점령군 사령부를 세울 것을 지시했다. 以北에 진주한 소련군은, 만주의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本國의 계획만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1945년 8월 초, 소련군이 한반도 東北지방의 항구(청진 등) 일부를 점령했던 것도 이런 작전계획의 일환이었다.

반면, ‘맥아더 포고령’이 발표되었을 때에는 ‘일반명령 1호’에 의해 한반도 분할통치가 확정된 뒤였다. 즉, 미국이 한반도 以南만을 통치한다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에 ‘맥아더 포고령’에는 분할통치에 따른 구체적인 방법만이 담겼을 뿐 宣撫(선무·民心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대한 내용은 담을 필요가 없었다.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소련군은 日帝(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인들의 民心을 다스리는 데 주안점을 두어 감상적 용어를 사용해 이른바 포고문이란 걸 황급히 내놓은 것이다. 8월15일엔 분할통치를 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없었으므로, 포고령이란 걸 내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맥아더 포고령과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성격이 완전히 다른 이유이자, 포고문이 아닌 선전문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02년 12월20일 발간한 《한국사》 제52권 ‘대한민국의 성립’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치스차코프 포고문을 ‘포고문’이라 하지 않고 ‘호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8월 15일(注: 1945년)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짜코프 대장이 발표한 ‘호소문’에는 소련군이 조선 인민의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 실현은 조선 인민 자신의 몫이라는 점, 소련군은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정상적 작업을 원조한다는 ‘해방자’로서의 선언적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구체적인 소련의 정책은 밝히고 있지 않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구체적인 정책이 아직 제25군에게 주어져 있지 않았다. 뚜렷한 정치 행동지침을 입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반도를 일본제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현상 유지를 위해 조선총독부 기구와 관리를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택한 미국과 달리, 한반도를 ‘해방’하고 그 주민에게 권력을 되찾게 해 준다는 선언을 한 소련군으로서는, 일본 식민지 지배기구와 거리를 둔 한국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소련군은 각 지역에서 건국 준비를 위해 자생적으로 조직되고 있던 각종 자치기구들에 주목하였다. 소련군은 이들 자치조직들을 주둔정책의 협력자로서 인정하였다. 다만 여기에는 단서가 붙었다. 자치조직에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동등한 비율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방침은 먼저 함경도 지역에서 취해졌으며, 평양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429~430페이지)

위의 내용을 종합했을 때, 치스차코프가 소위 포고문(호소문)에서 밝힌 “이제 모든 것은 죄다 조선 사람들의 손에 달렸다” 등의 주장은 선전적 修辭(수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포고문이 아닌, 선전·선동 문건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한반도 분할점령이 확정된 뒤부터 소련군은 점령군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냈다. 해방 직후 이북 주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던 ‘인민위원회’를 자신의 입맛대로 개편, 소련군 측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많이 들어가도록 배후에서 조종했다. 우익성향의 曺晩植(조만식)이 발족한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에도 공산주의자들이 數的(수적) 우위를 차지하도록 소련군이 공작을 벌인 게 대표적인 예이다. 소련군은 남북한을 잇는 경원선과 경의선 등 철도를 끊기도 했으며, 통신도 두절시켰다. 소련語로 ‘코멘다투라’라고 불리는 ‘경무[慰撫(위무)]사령부’를 설치해 소련군이 행정권·경찰권·사법권을 통제하도록 했다.


5. 소련군 장교가 기록한 ‘붉은 군대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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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문서> / 출처: 우드로윌슨센터

2010년 초,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작성한 보고서(문서명: To member of the military council of the maritime military district, 문서번호: 03003)가 공개되었다.

1945년 12월29일 작성된 이 보고서는,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에 진주한 뒤 황해도와 평안도 등 3개道를 방문조사해 작성한 것으로, 소련어로 작성되었다. 현재 미국의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 인터넷 홈페이지에 英文 번역본이 올라와 있다.

여기엔 소련 군대(일명 ‘붉은 군대’)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 소련 군인이 自軍의 만행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자료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 군대의 만행은 끔찍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페드로프 중좌는 보고서에서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卑行(비행)을 저질러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적었다. 보고서가 밝힌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음주, 사고 등 부도덕한 처신들의 원천은 곳곳에서 발견되는 술 취한 군인들이다. 대낮에도 거리에서 술에 취한 군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신의주市의 70곳 이상의 여관과 공공건물에서는 밤마다 질펀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
(2) 884부대 공병장교 막시모프는 조직적인 약탈을 벌였음에도 처벌받지 않았다. 막시모프는 12월6일 길주시로 칸보이 차량을 통해 들어왔는데, 그날 밤 그의 휘하 병사 7명과 지역 내 여관에 투숙했다. 이들 모두는 밤새 취해 있었고 행패를 부리며, 여자를 요구했고 아침에 돈 한 푼 내지 않고 자리를 떴다.
(3) 조선인 한 명이 술에 잔뜩 취한 소련군 중위를 소련군 연대로 끌고 갔다. 술 취한 군인 한 명에게 총으로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이 조선인은, ‘내 아내를 강간하려 한 (소련군) 중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4) 258 소총사단장인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 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으니 좀 더 노예로 있도록 하자”는 말을 남겼으며…>

보고서에는 술 취한 소련 군인들이 저지른 각종 醜態(추태)들이 현장감 있게 실려 있다. 이들은 폭력은 물론, 부녀자를 상대로 겁탈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소련군 지휘부가 보여준 각종 言行이다. 그중 치스차코프는 소련군의 약탈에 따른 蜂起(봉기)가 일어난다면 “조선 사람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would hang half of Korea)”란 극언을 했다고 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이 발언에 대해 페드로프는 “(치스차코프의) 위협성 발언은 그의 정치적 短見(단견) 중의 한 예(threats is evidence of his political shortsightedness)”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좌파세력이 추켜세우는 名文(명문)의 주인공이 이 모양이었다.


6. 소련군의 만행을 직접 겪은 사람들

지난해 초 <조갑제닷컴>과 <국민행동본부>는 ‘광복 70주년 기념 현대사 체험수기’를 공모해 220편의 手記를 접수했다. 응모자들의 手記를 읽어보니 소련군의 만행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된 金鏶(김집·동양방송 기자 출신) 씨는 자신이 보고 겪은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들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강간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가작 수상자로 선정된 吳允根(오윤근) 씨의 手記에도, 김집 씨가 쓴 내용과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해방 초기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영 딴판이었다. 가는 곳마다 시도 때도 없이 저지르는 그들의 만행은 상식을 초월하였다. 부녀자를 겁탈하고 시계, 만년필, 향수 등 화장품, 아름다운 문양의 천들을 훔치고 빼앗고 하는 그들에게선 강대국 군인다움을 찾아 볼 수 없었다.…(중략) 함경도 지방에서는 을사년(1905)의 러일 전쟁 때부터 러시아 사람을 ‘마우재’라 불러왔다. 코가 큰 사람을 마우재 코, 눈이 오목한 사람을 마우재 눈, 마우재 도둑질, 을사년 마우재 이런 말들이 생겨났었다.…(중략)
 큰길에 나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구경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마을 어귀에 소련 병사 10여 명이 나타났다.…(중략) 사방을 살피며 다가오던 병사 한 명이 나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섬뜩한 생각에 피할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붉은 군대’라는데 설마 무슨 일이야 하고 허세를 부려 버텨 보았다.
 점점 다가와 내 앞에 와서 선 그는 시계를 찬 내 왼팔을 잡는다. 이놈이 몇 시인지 알려고 그러는 줄 알고 시계를 그의 눈 앞에 들이댔다. 그는 그 팔을 비틀어 시곗줄을 풀어 자기 손목에 찼다. 그의 팔목에는 이미 세 개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께서 사주신 시계, 재산목록 제1호인 스위스製 손목시계를 이리하여 ‘영웅적인 붉은 군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기분이 더럽고 정말 씁쓸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만행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하였다.
 가끔 병사를 태운 軍 트럭이 지나가는데 이 또한 주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멀쩡히 지나가다가도 길가에 큰 기와집만 있으면 멈춘다. 타고 있던 병사들이 내려서는 떼 지어 그 집으로 들어간다.
 낮이라 남자들은 일터로 나가고 여자들만 있는 집에 소련병사들이 몰려오니 집에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뒷문으로 피해 도망갈 수밖에… 그러니 집은 텅텅 빈다. 빈집에 들어간 병사들은 마음대로 뒤져서 훔쳐가니 이런 노략질을 ‘마우재 도둑질’이라고 일컬었다.…(하략)>

 이들의 手記엔 페드로프가 작성한 보고서에 나온 것처럼, 소련 군인들이 주민들을 상대로 자행한 각종 약탈, 강간 등의 사례가 매우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7. 결론

14種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이러한 소련군의 만행을 수록하지 않고 일부는 (역사적 가치가 전혀 없는) 치스차코프의 선전·선동 문건을 수록해 소련군이 그 당시 한반도 이북 주민들에게 자치권을 주고, 해방자로 온 것처럼 誤認(오인)하게 만들었다. ‘치스차코프의 선전·선동 문건’과 ‘맥아더 포고령’을 아무런 설명(혹은 비판)없이 단순 비교한 교과서를 읽은 학생들은, 反美적 사고를 그대로 답습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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